제1회 천강문학상 시 시조 부문 대상
물풀
백점례
불볕 터진 들녘 너머 풀떨기 못물 아래
따라지들 몰려들어 스크럼을 짜고 있다
물길이 빠져 나가다 멱살 잡혀 누워있다
골풀의 부추김에 울컥 솟은 부들이며
핏줄 푸른 마름곁에 웃자란 생이가래
한 평생 반듯한 자리 올라설 수 없었다
부푸는 소문의 늪 뻗쳐 오른 결기마저
시간이 지나가면 너겁이 되고 만다
숨었던 실뱀 한 마리 심란하게 지나가고
흔들리는 그 바닥고 우주임을 알았을까
수렁에 빠진 무릎 수면 위로 기어올라
한켠에 노랑어리연 발 씻으며 웃는다
제2회 천강 문학상 시조 부분 대상
새의 지문
장은수
저문 시간 사려앉은 암사동 유리벽 속
침묵만 그득고인 빗살무늬 토기위에
태고적 숨을 쉬는가
갈맷빛 새 한마리
조개칼 구름같은 그늘이 꽈리 틀고
시선에 갇혀버린 목마른잠 어리에
재우쳐 날지 못한다
바람에 말 새기면서
체에 거른 앙금마저 주무르고 다독이며
옹글게 벚어올린 점토의 면벽에서
아직도 형형한 눈빛
오그린 발이 저리다
의문처럼 걸려있는 아득한 지문 하나
천년도록 움크렸던 화석의 죽지를 털고
한순간 빗장뼈 세워
꿈결인듯 퍼덕인다.
제3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누이의 강
-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송영일
솟대 위에 떠오른 달
오롯하게 품고 있다.
그림자 이운 자리 여백으로 남겨 놓고
덜 아문
생채기 하나 물비늘로 반짝인다.
많은 날 달구었을
뜨거움을 식히려고
사초史草 적신 은하수를
온몸에 머금은 채
별빛을
일렁이고 있는 유백색의 저 여인.
주고받는 눈길 위에
울컥, 울컥거리는
가부좌한 시간만큼 한 생을 수절하고도
언제나
염화미소 짓는, 우리 누이 저기 있다.
* 유물번호 신수(新收) 2587 백자항아리. 은은한 백색 유약이 발라져 단아한 분위기와 기품을 자아내며 부피감이 뛰어나고 안정감이 있는 형태이다.
제4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만복열쇠점
박해성
척하면 열려라 뚝딱
천국 문도 연다는
우리동네 공인9단 열쇠 장인 김만복 씨
꽉 잠긴 생의 비상구, 정작 열 줄 모르면서
헌 잡지처럼 찢어버린 과거는 묻지마라
기꺼이 갇혀 사는 반 평 독방 컨테이너
탈옥은 꿈꾼 적 없다
반가부좌 부처인 듯
호적조차 말소당한 애물단지 스쿠터는
꽃을 받고 훌쩍이던 다 늙은 아내인지
이따끔 딸꾹질하는 빗장뼈가 수상한데
온 세상 잠긴 문은 노다지, 노다지라
불러줍서예,
집집마다 전화번호 붙여놓고
만 가지 복 중에 하나
느긋이 찻물 우린다
제5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늦가을 문상
유선철
소주병 서너 개가 대문 앞에 누워있다
물이랑 첨벙첨벙 건너온 가난 앞에
애꿎은 담배연기는 생머리를 풀었다
쑥부쟁이 스러지는 꽃의 행렬 끝자락에
심장이 뜨거워서 차마 못 건너는 강
이승의 한 모퉁이가 아직도 불콰하다
저 푸른 논객의 칼, 나 언제 가져보았나
바람을 맞서다가 바람이 되어버린
그 남자, 소실점 돌아 또 한 잔을 건넨다
손바닥 화엄경
느꺼운 마음으로 네 발자국 받아든다
기다린 시간보다 짜릿하게 흐른 전류
까만 눈 곤줄박이가 하늘 한 잎 물고 왔다
땅콩 반 조각에 경계심 풀어지고
뻑뻑한 세상살이 덜어주는 저 날갯짓
우리가 하나인 것을 그도 이미 아는 걸까
실낱같은 두 다리로 창공을 차고 올라
단 한 번 날지 못한 내 꿈을 펼치는 이
하늘과 손바닥 사이, 뚫린 길 시원하다
대가야, 무늬를 켜다
가락국 푸른 소녀 사박사박 걸어온다
맨발에 밟힌 어둠 촛불로 쓸어내면
말발굽 스친 자리가
별안간 시큰하다
산맥을 넘어온 바람 풀무질 재촉할 때
굽다리 접시 아래 숨겨둔 분홍 꽃신
쇳물에 녹은 사랑이
봉분 속에 갇혔는가
과녁에 닿지 못해 화살촉 부러진 밤
가야금 엇박자에 음정을 또 놓치고
남자는 울음을 털며
불새로 날아간다
제5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아우라지
김석이
휘감아 도는 물길 위에 어긋나는 빗금무늬
마음하나 구겨 넣고 솔기까지 밟고 왔다
돌 하나 들추었더니 막혔던 소리 열린다
이리저리 부딪쳐서 가보지 못한 저 편
소용돌이 밑바닥에 귀를 막고 웅크린
미세한 물의 세포가 소름처럼 돋고 있다
손이 손을 내미는 그곳에 잡힌 음률
얼마나 돌고 돌아야 모난 부분 공굴릴까
귀퉁이 잡아 당기며 홑청 위에 눕는 하늘
한 길로 간다 해도 부딪쳐야 길을 내는
굴곡진 꼭지점도
선 하나로 이어진다
다시 또, 허리를 펴며
길을 가는 어머니
겨우살이
참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잉태한 봄의 소리 귀를 대고 들어 본다
서로를 얼싸안은 몸, 허공도 숨 죽인다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웅웅대던 겨울 밤
문풍지로 막은 바람, 바늘구멍 뚫고 오듯
틈이란 비집기 위한 또 다른 길의 이름
힘겹게 살아가는 소녀가장 두 어깨에
올려진 햇살 한 줌 등불로 내걸린다
어두운 곳에서 보면 여린 빛도 길이 된다
흔들리는 길 위에서 맨몸뚱이 부벼가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엮고 있는
매서운 칼날추위도 끊을 수 없는 꿈
곡선으로 길을 내다
봉우리 봉우리가 골짜기를 품고 있다
수평선도 다가가면 끝없는 잔물결
한고비 넘을때마다 우두망찰 멈춰선다
언덕에서 미끄러지고 가시덤불 휘감아도
바닥을 어루만져 소리로 귀를 여는
시냇물, 돌 틈 사이로 목마른 곳 찾아 간다
길가에 피어있는 야생화의 흔들림
온 몸 구부려 바람의 매듭푼다
가녀린 떨림이 모여 뿜어내는 그 향기
모퉁이 돌때마다 목을 꺾어 돌아보면
아스라한 그리움도 멈칫멈칫 따라온다
곡선이 아름다운 건 굴곡이 있어서야
제5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균열
성국희
허름한 지붕에선 오늘도 비가 샙니다
엉성한 내 마음도 자꾸만 젖습니다
허물어 다시 놓을까요
철떡같은 약속 하나
뒤틀어진 그대 눈빛, 잠그다 만 그대 방문
떨리는 노크소리가 밖으로만 구릅니다
굴러와 내 발잔등에
소복이 쌓입니다
삐걱대던 뼈대 하나 찬바람에 금이 가도
화려한 리모델링, 생각 한 장 찢습니다
커지는 오해라는 틈
달빛 채워 메웁니다
골목길 에세이
허기진 새벽보다 은유가 더 고픈 시간
신발 신고 읽어보는 골목길 이야기 하나,
찢어진 어느 갈피엔 젖은 꽃잎 말라간다
남편 입 안 가득 밴 실직의 알싸한 맛
달달한 꿀물 한 잔, 마른 길을 적셔놓고
섬 하나 통째 우려내 세상 속도 푸는 그녀
좁은 길 배불리는 하루해를 불러와서
헛헛한 어깨들의 무표정을 밝힐 때면
촉 세운 바람의 행간, 해피엔딩 갈무린다
병실에서
-J에게
1.
마당귀에 심어졌던 키 작은 모과나무
제 그림자 지우는 법 배워가는 시간이다
꽤 깊은 응달 저편에
닿지 못한 봄 햇살
말문을 닫아걸고 안으로 키운 옹이
비바람 파고들자 속울음도 깊었는지
밤이슬 감싸 안던 품
생살을 앓고 있다
2.
첩첩산중 골짝마다 삐걱대는 발걸음아
보름달 저 뽀얀 맨발, 상처하나 없어뵈나
붉은 강 건너온 시간
새살 돋아 환한 것을
제6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저녁의 안쪽
박복영
어둠의 기척으로 등불은 내걸린다
응집된 소리들과 분할된 소리들이
나직히 속살거리며 무게를 더는 시간
시선은 바깥으로 마중을 나간다
바람의 발자국을 경청하는 들녘에
나른한 젖은 노동을 끌고 오는 맨발들
더불어 걸어야할 시간들을 보았을까
어둠이 짙을수록 바람으로 흔들려도
서로를 다독거리며 지친 몸을 세운다
빨래터*
청명한 냇가에서 긴 머리 풀어 감고
머리카락 갈래지어 단단하게 매듭질 때
젖가슴 더듬어 찾는 어린아이 달래가며
가난한 과부의 생 꿋꿋하게 건너는데
서러운 시간인 듯 두드리는 방망이는
빨래 속 더러움들을 벼리고 벼리다가
탁탁, 튕겨나는 소리마다 비루**(飛陋)풀어도
춘복 짓고 하복지어 빨래하기 어렵더라***
힘겨운 시집살이를 서로에게 위로하니
슬픔도 눈물인 양 모짝모짝 말라가리
첩첩이 쌓인 일들 직수굿 풀다보면
비로소 서러운 매듭 속절없이 풀어지리
*빨래터 : 김홍도 풍속화첩 중 하나
**비루(飛陋) : 더러움을 날아가게 한다는 뜻. 직물이나 얼굴 씻을 때 팥, 녹두등을 갈아 씀
***조선시대 내방가사 중 여자 탄식가
모월모일某月某日
어둠비늘 벗기는 새벽빛 기척 속에
홀로 핀 해당화는 허공에 태胎를 묻고
비워도 차오르는 빛
애틋하게 뒤척인다
속세의 설화인 양 풀어지는 강물따라
갈대들의 마른 꿈들 서걱이며 흔들리고
바람의 발자국마다
인연의 끈 묶어지니
이윽고 순응하며 살아온 격정의 날들
서슬 퍼런 시름 딛고 일어서서 수런대며
힘겨운 세상 징검돌
가뿐하게 넘고 있다
박복영
62년 전북 군산 출생. 1997년 월간문학 시 당선. 2001년 방송대 문학상 시 당선.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당선. 2014년 천강 문학상 시조대상. 시집 “눈물의 멀미”외
제6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셔코항에서
깊이를 알 수 없이 던진 돌 빠져들고
수평선 너머 문득 배 한 척 가뭇없다
우콰이! 푸른 목청이 이방인의 귀를 끈다
함지마다 숨을 쉬는 비릿한 짐승처럼
몸으로 부대끼며 비린내로 살아있는
밑바닥 꿈틀거리는 비늘 달린 사람들
다음 생 몸을 바꿔 목어로 태어날까
몸으로 파닥이는 여기가 본 자리다
생물의 몸내가 물씬 항구 가득 퍼진다
*셔코항: 중국 심천 남쪽에 있는 항구
*우콰이: 위엔화 5원
토란잎을 듣다
뒤뜰의 텃밭에서 빗소리가 돋아난다
귀 활짝 열고 보니 빗소리만이 아닌
토란잎 비를 맞이해 제 몸 여는 소리다
설렘을 함초롬히 둥글게 빚은 소리
모였다 흩어지고 하나로 다시 모여
새뜻한 여름 첫 자락 은구슬로 빛난다
비 멎고 날빛 속에 가만가만 뒤척이다
슬픔인 듯 기쁨인 듯 살갑게 맺어진 것
한순간 다 내려놓고 맑게 씻긴 고요다
가을 끝에 이르다
제 빛을 한껏 내어 막바지 피는 꽃들
목숨의 화사한 끝 덧없음이 눈부시어
한 나절 그저 한 바탕 꿈이어도 좋을 듯
사뿐히 나는 나비 슬픔이 없는 걸까
몸을 가진 것들은 다 아픈 것이라고
서로를 가슴에 들여 뒤척이는 가을꽃
기우는 가을 한 쪽 온갖 꽃이 진 뒤에야
고요 속 서리꽃이 써늘히 피어나고
먼 곳이 한결 가까이 맑은 눈에 담기다
이윤훈
- 1960년 경기도 평택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현 중국 광동성 동관 한림학교 국제부 근무
제6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배웅
아버지 묻고 내려가는데 헛기침 들린다
돌아보니 노인 하나 웅크리고 앉아서
맨살의 마른 알몸을 붉은 노을에 씻고 있다
임종을 혼자 지켰다는 듯 귀신새가 운다
유언을 토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쏟아낸 암 덩어리 움켜쥐고 한 사내 저물었다
저 북쪽 어딘가에서 봄꽃이 다시 피고
30대의 모습 그대로 어머니가 손짓한다
먼 곳이 반세기 만에 가까운 곳 되려한다
못난 아들 발걸음이 팍팍하게 무너진다
아는지 모르는지 들꽃의 처연이 깊다
그 어떤 설움으로도 배웅이 될 수 없는데,
응달의 법칙
눅눅한 당신이 모퉁이를 돌아나가자
급하게 생긴 균열 구름이 덮고 지난다
그림자 끝나는 곳에 낯선 풍경 세워지고
목구멍 아래 눌려있던 울음이 꿈틀거린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모서리가
남몰래 자지러진다 옆구리가 서럽다
한발 옮기자 축축한 돌멩이가 밟힌다
두렵지 않다고 주문을 외워야 한다
양달과 응달의 경계가 짧고 강렬하다
어두운 곳에 처음 들어서면 까마득하다
그러다 아린 그늘이 몸 안에 스며들면
우둔한 내가 보인다 무엇도 될 수 없는,
일정하게 좁혀왔다가 일정하게 늘어나는 건
그늘만은 아니라 슬픔의 총량이다
오늘은 응달이 국경이다 발목이 자꾸 저린다
증언
6인실 안쪽 침대 위에 리모콘이 앉아 있다
채널을 두고 싸우던 최씨는 오지 않고
김씨는 끝끝내 울음을 토하고 말았다
9시 뉴스와 드라마 사이 다툼이 흘렀고
가족도 하나 없이 핀잔으로 떠돌던
고집의 주파수들이 그들은 맞지 않았다
먼저 가면 어떡해! 이 썩을 영감탱이
위를 70% 잘라내고도 의기가 양양했는데
울분이 급성으로 번져 넘치고 흘렀다
조경선
- 1961년3월15일 경기 고양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석사 졸업 2012년 『포엠포엠』 신인상으로 시 등단
제7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갈잎, 붉다
권정희
산이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온갖 꽃들 훌훌 지고
비 뚝뚝 듣고 난 후
오지게
초록에 묻혀
꺼이꺼이 우는 소릴
가풀막 길 능선자락
귀 열고 선 나무들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굽이도는 저 울음들
잎마다
풀어 놓는다
가을이면 저리 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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