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꽃피는 손수레 
-남궁 증
 
거친 손 열 손가락 상처 깊은 저 손수레  

질척이는 시장 안을 맨몸으로 굴러간다  
꽉 물은 자식걱정에 헛바퀴는 자꾸 돌고 
 
깨진 무릎 덧댄 상처 헝겊으로 칭칭 감아  

얼기설기 실은 짐에 살과 살을 맞대면  
시장 끝 가파른 길도 등을 숙여 숨 고른다  
 
가난한 맘 서글픈 맘 어루만져 다시 보고  

수천 원의 꽃잎 호명 손위에서 피어날 때  
살 에는 햇살을 딛고 아버지! 걸어간다  
 
◆남궁 증
남궁 증

남궁 증

1960년 강원도 홍천 출생. 현재 태백시청 근무. 중앙시조백일장 2017년 7월 차상. 제21회(2018년)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금상(국무총리상). 수년 동안 중앙시조백일장 심사평을 위주로 습작.

    
차상
대룡시장* 신발가게  
-강영석
 
총성이 벗어놓은 철 가시 둘러멘  섬  

좌판 위에 서성이는 먼지 쌓인 신발들이  
덤불 틈, 비집고 넘는 바람 한 점 신습니다 
 
쓸어내리면 더 아픈 기억 얼룩을 닦습니다  

옹이 빠진 지팡이 짚고 버티고 선 어르신  
걷어둔 향기 한 장을 깔창 위에 포갭니다 
 
하루 해가 건너 포구 선착장에 닿을 때면  

불면으로 뒤척이듯 발걸음은 엉켜져도  
허기진, 그리운 고향 밑창 잇새 끼웁니다    

 


   *대룡시장: 강화군 교동도 민통선 안에 실향민들이 꾸린 시장  

 
차하
염전
-고경자
 
수십 개 조각보 이어 붙인 소금밭에  

바람이 박음질해 놓은 하얀 결정체  
증발한 부귀영화도 티끌 모아 태산일까 
 
젊은 한때 짠 맛도 모른 채 살다가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 같은 그 맛에  
염전을 지키는 텃새, 바닥을 쪼고 있다
 
이달의 심사평
초여름의 싱그러운 녹음이 생명의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6월, 살아 숨 쉬는 체험을 생생한 감각으로 녹여낸 작품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아직도 시조장르의 존재의미인 율격의 운용에 대한 올곧은 이해가 부족한 작품들이 많았다. 이런 선정척도에서 가장 무난한 호평을 받은 남궁 증의 ‘꽃피는 손수레’를 장원에 올린다. 시장 안의 “손수레”를 통해 고단하고 힘겨운 가난의 무게와 삶의 역경을 헤쳐 나가는 아버지의 사랑을 밀도 높은 현장감과 선명한 심상으로 조명해내고 있다. 첫수 “열 손가락” “맨몸” “헛바퀴”의 괴로운 손수레는 둘째 수 “상처” “짐” “가파른 길”로 인식되는 고통스러운 현실적 삶을 수용하고 셋째 수 “꽃잎 호명” “햇살”의 이미지로 반전되면서 “아버지!”의 강인한 생명의지로 아름답게 형상화된다.
 
차상으로는 강영석의 ‘대룡시장 신발가게’를 올린다. 주석에서 밝혔듯이 민통선 안의 시장인 대룡시장 신발가게의 모습을 통해 실향민의 아픔과 그리움을 군더더기 없는 묘사로 탄력 있게 그려낸 수작이다. “먼지 쌓인 신발” “얼룩” “발걸음”이 단절과 향수의 비극적 현실을 더 생생히 부각시킨다.
 
차하로는 고경자의 ‘염전’을 선한다. 아버지가 남기신 염전에서 삶의 진정성을 발견해내는 종장처리의 감칠맛 나는 묘미가 돋보였으나 “부귀영화” “티끌 모아 태산” 같은 안이한 관념어가 흠결로 지적되었다. 이 외에도 이현정, 김정애, 조우리 등의 작품이 논의되었으나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박권숙·염창권(대표집필 박권숙)
 
초대시조 

 

물의 화엄 
-김영주
 
한바탕 소용돌이 휩쓸고 간 모래톱에

깨진 병조각이 시퍼렇게 꽂혀 있다
누구든 스치기만 해도  
살을 쓰윽 벨 기세로  
 
파도는 너른 품으로 보듬었다간 돌아서고
눈물을 삼키면서 보듬었다간 돌아서고
제 혀를 자꾸 베이며
끌어안고 핥아준다
 
그렇게 숱한 날들이 지나고 또 지난 후에
너울도 닳아져서 지쳐 그만 잦아든 후에
그제야 날「刃」을 다 버리고  
둥글게 내주는 몸
 
◆김영주
김영주

김영주

경기도 수원 출생. 2009년 문예지 ‘유심’을 통해 등단. 시조집으로『미안하다 달』 『뉘엿뉘엿』 『오리야 날아라』 등이 있으며,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에메랄드 빛 보석 하나가 파도에 휩쓸리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문득 궁금해서 건져보았더니, 깨어진 소주병 조각이었다. 물론 맨 처음 깨어졌을 때는 여기저기 삐죽삐죽 모가 났을 게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파도가 끈질기게 애무해준 덕분에 둥글둥글 모가 달아서 이제는 귀걸이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시인도 아마 비슷한 경우를 본 모양이다. 그런데 시인은 놀랍게도 깨진 병조각을 끊임없이 보듬어주었던 파도에다 곧장 고성능 현미경을 들이댄다. “끌어안고 핥아”줄 때마다 날카로운 병조각에 ‘제 혀가 베여’ 시퍼런 바다의 한쪽 귀퉁이를 온통 붉은 피로 물들였던 파도! 바로 그 파도가 제 몸을 온통 상처투성이로 만들면서 줄기차게 보듬어준 덕분에 깨진 병은 마침내 “날[刃]을 다 버리고” 보석으로 바뀐다. 이게 바로 ‘물의 화엄’이다.
 
“풀잎이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과 사람 사이 파고들고 싶단 말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싶단 말씀// 풀잎이 또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과 사람 사이 띄어주고 싶단 말씀/ 가까워 너무 가까워 상처 주지 말란 말씀//풀잎이 자꾸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도 풀잎처럼 손 내주고 살란 말씀/ 손잡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란 말씀”. 같은 작자의 ‘풀잎이 하는 말씀’이란 시다. 앞의 시가 ‘물의 화엄’이라면 뒤의 시는 ‘풀의 화엄’이다. 화엄 세계가 어디 먼 곳에 따로 있기야 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물이 했던 행위와 풀잎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바로 이 사바세계가 절대적인 조화와 항구적인 평화가 공존하는 참말로 눈부신 화엄 세계가 되지 싶다.  
 
이종문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 또는 e메일(choi.sohyeo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79.
 
 


[출처: 중앙일보] [중앙 시조 백일장] 6월 수상작

 

 

 

중앙시조백일장 5월 당선작

 

<장원>

 

벽화


김종순

양지바른 곳으로 나와 앉은 할머니들
담벼락에 무채색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든
빛바랜 점묘들

주름을 말리느라 햇살들 분주하고
희미한 배경색으로 기억들이 다가오면
한때는 꽃이었던 시절
대낮처럼 환하네

허공을 응시해 보는 뜨거운 눈빛이여
수없이 그리고 색칠하고 싶은 그 자리
지금은 여백 속으로
새들이 날고 있다

 

◇김종순=1964년 경남 함안 출생. 창원대 독문과. 현재 상담심리사. 자유시집 『식탁에 앉은 밭이랑』『물방울 위를 걷다』. 기성 시조시인 작품집 보며 시조 독학.

<차상>

 

그 여자, 마네킹

유영희

축 처진 두 어깨가 저녁을 끌고 간다
낮 동안 켜 놓았던 삼십 촉 백열등이
어둠에 살점 뜯긴 채 끌려가는 모퉁이

비좁은 시장골목 붉은 유리창 너머
유행도 신상품도 알지 못하는 여자
온종일 비닐 앞치마 입고 고기를 썬다

그녀의 패션에는 추종자가 없다는 것
도마와 목장갑이 유일한 소품이다
고개도 꺾지 못한 채 가끔 웃는 그 여자

<차하>
코스프레


설경미

몇 바퀴를 돌아도 보이잖는 빈자리
오늘만, 딱 한 번만 내밀고 걸어본다
임산부 주차장에서 오십 줄에 분장놀이

허리에 손을 얹어 양심을 꾹 누르고
졸린 듯 눈 비비고 거짓말에 두리번
저기요 하는 소리에 지레 놀라 멈춘다

이달의 심사평
지난달의 풍성함에 비해 이번 달은 잠시 숨을 돌리고 가는 모습이다. 신록의 터진 틈으로 스며드는 햇살과, 그 아래의 그늘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장원에 오른 김종순의 '벽화'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노년의 형상이 담벼락 위에 실루엣처럼 걸려 있다. “주름을 말리느라 햇살들 분주”할 때 꽃이었던 기억들로 환해지지만, 그건 허공을 더듬어 되짚어본 희미한 배경색 위에 잠시간 떠올랐다 사라진다. 쇠라의 점묘화를 보듯, 생의 한 장면을 덧없는 햇살그림으로 이미지화하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차상으로 유영희의 '그 여자, 마네킹'을 올린다. 그 여자의 형상은 마네킹으로 은유된다. “유행도 신상품도” 알지 못하지만 “삼십 촉 백열등”이 켜진 “붉은 유리창 너머”에 그녀의 삶이 전시되어 있다. 활달한 시상 전개를 바탕으로 마네킹에 비유된 여성의 삶이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수작이다. 동봉한 다른 작품이 따라주지 못했다.
차하에는 설경미의 '코스프레'를 올린다. 임산부용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새삼 임산부 흉내, 즉 “코스프레”를 하며 지레 겁먹는다는 내용의 글이다. “오십” 대 여성의 심리를 완곡하게 드러낸 것에 비해, 직설적인 어법과 완결성 부족이 지적되었다.
이 밖에도 조우리·최경미·정화경의 작품이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분발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박권숙·염창권(대표집필 염창권)

<초대시조>
신발의 역사

서희정

귀가 후 현관 앞엔 한 가족이 엉켜 있다
한밤중 불을 켜자 부스스 깨다 말고
고단한 하루를 눕힌 채 잠꼬대가 한창이다

그 잠꼬대 잦아들자 희멀건 새벽달이
빠끔히 베란다를 넘어와서 기웃대더니
새하얀 홑이불 같은 달빛 풀어 덮어 준다

뒤 굽이 닳은 채로 널브러진 구두들이
지고 갈 또 하루를 채근하며 기다린다
제각각 갈 길이 달라도 두말 없는 순종이다

◇서희정=1990년 서울 출생. 한성대 무역학과 졸업. 2017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18 좋은 시조’라는 책을 넘기는데, 세계와 인간에 대한 드높은 사랑을 쉽고도 구체적인 언어로 포착한 시조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작자 서희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분이었다. 검색해 보았더니, 작년에 등단한 20대 후반의 젊은 시인이다. 이 젊은 시인의 앞날을 뜨겁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시조를 초대키로 했다.

‘신발의 역사’는 가족들이 모두 귀가한 후에, 현관 앞에 흩어져 있는 낡은 신발들을 바라보는 데서 시상이 시작된다. 시적 화자는 서로 뒤엉켜서 나뒹굴고 있는 이 신발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인식한다. 이른바 ‘신발 가족’이다. 지금 ‘진짜 가족’들이 고단한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서로 뒤엉켜서 잠꼬대를 하며 잠을 자고 있듯이, ‘신발 가족’들도 현관 앞에 서로 뒤엉켜서 “고단한 하루를 눕힌 채” 지금 “잠꼬대가 한창이다.” 더러 하품을 하기도 하고. 이윽고 ‘희멀건 새벽달이 베란다를 넘어와 새하얀 달빛 이불’로 ‘신발 가족’들을 덮어 준다. 마치 어머니가 이불을 걷어차고 자고 있는 가족들에게 새하얀 이불을 다시 덮어주듯이.
이처럼 작품 속의 ‘신발 가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가족’들의 모습과 겹쳐져 있는데, 이 점은 마지막 수에서도 다시 한번 드러난다. “지고 갈 하루를 채근하며 기다리”는 문맥상의 주체는 물론 “뒷굽이 닳은 채로 널브러진 구두”다. 하지만 이 대목의 실제 주체는 그 구두를 신고 제각각의 하루를 “두말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구두의 주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진짜 가족’과 ‘구두 가족’의 합일에서 느껴지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참 애틋하고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랑 앞에 가슴이 짠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종문(시조시인)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지식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 또는 e메일(choi.sohyeo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79.

 

 

의도된 시간

 

최성아

 

 

봅볕에 해쑥인 듯 캐도캐도 돋아난다

기대선 도시철도 드러날 광고의 민낯

투영된 말의 문구가 생의 자락 끌고 간다

 

쉬지 않고 들어오는 저 인파 눈길 사이

잊지 않고 지나가는 역과 역 틈바구니

미끼로 시선을 낚을 걸음들을 재고 있다

 

늪에서 빠져나올 검색을 누르는 동안

떠밀린 미로 속을 앞지르는 힘을 본다

어둠을 막 떼어내는 출입문이 열린다

 

 

* 시조미학 Vol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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